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21 Sep 2007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 - 8점
후베르트 슐라이허르트 지음, 최훈 옮김/뿌리와이파리

원제는 “Wie man mit Fundamentalisten diskutiert, ohne den Verstand zu verlieren.”이고 대략 “이성을 잃지 않으면서 원리주의자(근본주의자)와 토론하는 법”인데 제목을 너무 선정적으로 바꾼 감이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 전투의 기록이다. <blockquote>사람은 누구나 다른 원칙에서 더 이상 도출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생각과 행동의 원칙을 갖고 살아간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또 이 원칙을 놓고 토론이 벌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갈등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광신화해 세상에 전제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 민족에 대한 ‘청소’가 시작된다. 여기가 계몽주의 운동에 대한 호소가 울려퍼지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기 훨씬 전에 시작되어야 한다.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지극히 위험하고 급진적으로 적용하는 일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의 빛은 악의 뿌리에 쏘아져야 한다. 마녀와 마술사에 대한 믿음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아무도 이 믿음을 ‘남용’하거나 ‘급진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리라고, 즉 마녀와 악마 사냥에 나서지 않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 순진함은 반드시 보복을 당하게 되어 있다.  –p. 9</blockquote>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저자는 ‘원리주의자를 논증으로 이기려는 건 소용없는 노력이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에 ‘뒤엎는 논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어느 당파에나 그 당파의 근본적인 원칙에 너무나 지나치게 깊은 믿음을 표명함으로써 동료들이 지닌 원칙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무너지게 만드는 사람이 꼭 있다. --F. Nietzsche

어떤 사람, 어떤 책을 가장 날카롭게 비난하는 방법은 그 사람, 그 책의 이상향을 그려 보여주는 것이다. --F. Nietzsche

'뒤엎는 논거'란 위에 인용한 니체의 말처럼, '그 사람, 그 책의 이상향'을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그려 보여주는 것이다. 황우석 사태때 만들어진 "음모론 지도"가 좋은 예다. 그 지도는 단지 그 동안 제기되었던 음모론들을 순진하게 한데 모아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지도 한 장이 가진 설득력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들다.

종교를 포함한 어떤 이데올로기들도 패배시키거나 반증하거나 극복할 수는 없다. 반면 이데올로기는 여리고의 성벽만큼만 견고하다. 나팔소리 몇 번에 그냥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반박되거나 패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추레해지고, 무시되고, 따분하고 지겨운 것이 되고, 그래서 잊혀지는 것이다. --p. 175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경전에 적혀 있긴 하지만 일부러 지나치고 마는 부분을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는 이런 명령이 들어 있다.

제 아비에게 손찌검을 한 자는 죽여야 한다. 자기 부모에게 욕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누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p. 189

볼테르가 바로 이런 방식의 논거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성경주석서를 쓰기도 했다. 

볼테르는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내재적인 비판이 취하는 조치들을 그야말로 성실하게, 경계심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순진하게 제시함으로써 그 조치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내어 보여줄 뿐이다. ... 구약성서의 성령 입은 인물들이 저질러놓은 수많은 피바람과 관련해서 볼테르는 이런 주석을 달아놓는다. 

식자들은 그 모든 (피바다) 사건들을 완전히 부인한다. 성령이 스며 있는 이 일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구약성서의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고, 다른 부분은 내팽개칠 수 있는가? ... 이 이야기를 믿든가, 아니면 성서 전체를 버려야 한다.
--p. 157

노아와, 그의 방주와 무려 150일 동안 계속된 홍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 그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볼테르가 이 이야기를 ... 얼마나 멋지게 서술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홍수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기적적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 물이 가장 높은 산보다 무려 열다섯 자나 더 높이 차올랐다는 것도 기적이고, 하늘나라에 수도관, 문, 구멍 등이 있었다는 것도 기적이고, 세계 각처에서 온갖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왔다는 것도 기적이고, 노아가 여섯 달 동안이나 그 많은 동물들을 먹일 음식을 갖고 찾아냈다는 것도 기적이며, 방주에서 살던 모든 생물이 다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양식이 있었다는 것도 기적이고, 대부분의 생물이 거기서 죽지 않았다는 것도 기적이며, 방주에서 나와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도 기적이고, ...
... 볼테르는 ... 기적 이야기를 지극한 애정으로 상세하게 다시 그려낸 다음, 뻔뻔하리만큼 노골적인 가짜 신성함으로 그의 서술을 끝맺는다.
하지만 홍수 이야기를 설명하려 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가 사람이 일찍이 들어본 것 중 가장 기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오직 믿음의 힘으로만 의심을 막을 수 있는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성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기적이다. 이 대홍수 이야기뿐만 아니라, 바벨탑 이야기, 빌레암의 암탕나귀 이야기, 나팔소리에 예리코의 성벽이 무너진 이야기, 물이 피로 변한 이야기, 홍해를 건넌 이야기 등, 신이 자신이 선택한 민족을 사랑하사 행한 모든 기적들도 다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인간의 정신으로는 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p.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