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과 결정론

14 Jan 2008

alankang:21세기 결정론자를 읽고 씁니다.

alankang님이 양자역학에 근거한 반론을 방어하기 위해 제시하신 사고 실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물리학자가 어떤 물리적 대상을 관찰하고 있다.
  2. 물리학자는 원하는 자신이 횟수만큼 그 대상을 관찰하여 물리량을 얻어낼 수 있다.
  3. 물리학자는 환원적으로 그 대상의 내부를 분석하지 않고서 물리량이 규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Version 3의 물리학자는 Version 1의 수학자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시스템(시공간) 안에 갖힌 상태에서 시스템의 물리량을 측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해당 시스템이 결정론적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논증은 양자역학에 기반한 반론을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코펜하겐 해석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중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입자들은 파동함수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파동함수는 입자가 특정한 상태에서 발견될 확률을 알려줍니다. 이 입자에 대한 측정이 이루어지게 되면, 파동함수는 가능한 여러 상태들 중 하나로 붕괴collapse 하게 됩니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이러한 붕괴가 객관적으로 확률적인(objectively probabilistic) 과정입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 우연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완전한 우연입니다.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우연의 경우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따져 들어가면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설사 예측이 불가능한 시스템이더라도 내부에는 결정론적인 인과관계가 작용한다는 것을 보통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연은 주관적 우연이죠.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그 내부 기작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우연이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라늄 원자 딱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원자가 1초후에 붕괴할지, 10만년 후에 붕괴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붕괴할 확률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측정 여부와 상관없이 물리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회마다 보어와 논쟁을 벌였으며, 매번 기발한 사고실험을 고안하여 양자역학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그의 편지에 남아있는 다음 문장이 (흔히 'God does not play dice'로 일컬어지는) 잘 보여줍니다.

Quantum mechanics is certainly imposing. But an inner voice tells me that it is not yet the real thing. The theory says a lot, but does not really bring us any closer to the secret of the Old One. I, at any rate, am convinced that He does not throw dice.


숨은변수이론 (hidden variable theory)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숨은변수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보고 있는 입자들이 어떤 '내부상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상태를 기술하는 어떤 변수에 의해 그 입자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가정을 합니다. 우리가 측정할때 확률적으로 보이는 과정들도 모두 숨어있는 변수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숨은변수이론중에서도 '국소적 숨은변수이론 (local hidden variable theory)'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들 간에 빛보다 빠른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넣은 이론입니다.


EPR paradox

1935년에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더불어 EPR (Einstein-Podolsky-Rosen) 역설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이 논문은 양자역학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처럼 보였으며, 아인슈타인의 날카로운 공격을 모두 방어해내던 보어도 자신있게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고 실험은 양자역학에서 양자얽힘 (quantum entanglement) 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후에 좀 더 깔끔하게 다듬어진 EPR 실험에서는 각운동량을 가지지 않은 하나의 입자가 각운동량을 가지는 두 개의 동일한 입자로 붕괴됩니다. 이 두 입자는 up 스핀이나 down 스핀을 각각 가질 수 있지만 전체 각운동량이 보존되어야 하므로 하나의 입자가 up 이라면 다른 입자는 down 스핀이 되어야 한다는 제약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의하면, 우리가 측정하기 전까지 이 두 개의 입자는 up과 down 두 상태가 중첩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입자가 100km 정도 떨어져 있을 때 하나의 입자의 스핀을 측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이 입자의 스핀이 정해지는 바로 그 순간, 다른 입자의 스핀도 정확히 정해지게 됩니다. 이 상황은 마치 100km의 거리를 무시하는 순간적인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우 이상하죠. 반면, 숨은변수이론이 맞다면, 입자들은 생겨날 때 자신이 어떤 방향의 스핀을 가지게 될 지를 결정하게 되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두 입자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없으므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럼 아인슈타인이 옳았을까요?

벨의 정리

John S. Bell이라는 물리학자는, 놀랍게도, 양자역학의 예측을 모두 설명하는 국소적 숨은변수이론이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해냈습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 정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No physical theory of local hidden variables can ever reproduce all of the predictions of quantum mechanics.

다시 말하면, 어떤 양자역학의 예측 A가 존재하는데, 이 A는 그 어떤 국소적 숨은변수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말하면, 실험을 수행했을때 양자역학이 예측한 결과가 나온다면 모든 국소적 숨은변수이론을 내다버릴 수 있는 그런 실험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정론적 해석인 숨은변수이론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벨의 정리는 '벨 부등식'이라는 통계적인 상관관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부등식으로 표현됩니다. 이 부등식은 양자역학이 옳다면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이후 여러가지 변형들이 발표되었으며, 숨은변수이론의 예측과 양자역학의 예측이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게 되는 GHZ state (Greenberger-Horne-Zeilinger state) 라는 양자역학적 상태도 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까지 행해진 실험은 모두 양자역학(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합니다. 양자얽힘현상은 양자정보학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즉, 현재까지 인류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어떠한 국소적 숨은변수이론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저는 결정론자가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