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의 기능

07 Aug 2016

주의: 이 글의 저자는 의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내용의 정확성이나 최신성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의학적 권고가 아니며, 이 글에 수록된 정보는 전문가의 진단이나 처방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해열제 안 먹인다고 면역력이 좋아지지 않는다” 를 읽었다. 처음에는 끄덕끄덕하면서 읽다가 열과 해열제에 대한 다음 논평이 뜻밖이었다.

어린이가 아파서 열이 펄펄 끓는데 약을 쓰면 나쁘다고 해열제를 주지 않는 것은 차라리 아동학대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런다고 면역력이 좋아지거나, 병에 덜 걸리거나, 어떤 식으로든 병에 대처하는 능력이 좋아진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미국의 가이드라인

먼저 권위 있는 건강 정보 사이트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찾아보았다. 첫번째는 미국의 의료와 건강 정책을 총괄하는 NIH (미국 국립 보건원) 가 운영하는 메드라인플러스 (MedlinePlus) 라는 건강정보 웹사이트다. 여기 “열” 페이지를 읽어보면,

열이란 체온이 정상보다 높은 상태를 말합니다. 열 자체는 병이 아닙니다. 열은 몸이 감염에 맞서 싸우는 방어기제의 일부입니다. 감염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정상체온에서 잘 활동합니다. 약간 높은 체온은 이런 병원체가 살아남기 힘들게 만듭니다. 또한, 열은 몸의 면역계를 활성화시킵니다.

A fever is a body temperature that is higher than normal. It is not an illness. It is part of your body’s defense against infection. Most bacteria and viruses that cause infections do well at the body’s normal temperature (98.6 F). A slight fever can make it harder for them to survive. Fever also activates your body’s immune system.

세계 최고의 병원으로 종종 꼽히는 마요클리닉도 건강 정보 웹서비스를 운영하는데, 여기서 제공하는 열에 대한 정보를 보자.

… 여러 종류의 해열제를 약국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열제를 사용하는 게 항상 좋지는 않습니다. 열은 당신의 몸이 많은 종류의 감염과 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A number of over-the-counter medications lower a fever, but sometimes it’s better left untreated. Fever seems to play a key role in helping your body fight off a number of infections.

게다가 해열제 페이지를 보면,

미열의 경우, 의사가 해열제를 추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열을 일부러 내릴 경우 병이 오래가게 하거나, 열의 원인을 찾기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For a low-grade fever, your doctor may not recommend treatment to lower your body temperature. Doing so may prolong the illness or mask symptoms and make it harder to determine the cause.

즉, 열이 나도록 놔두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뇌손상과 열성경련을 막으려면 해열제를 써라?

인터뷰에서는 열을 가만히 놔둘 경우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열성 경련이라도 일으킨다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혹시 땀을 흘리면 빨리 좋아진다고 이불로 꽁꽁 싸놓기까지 한다면 열 때문에 못 먹어 탈수된 아이들은 자칫 뇌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어떤 증거가 있을까? 이런 위험에 대해 외국에서는 어떤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 있을까?

영어 위키백과 “열” 페이지에 가보면, 두 편의 논문을 바로 찾을 수 있는데, 하나는 2015년에 Archives of Disease in Childhood1 에 실린, “Who’s afraid of fever?” 라는 제목의 영국 과학자의 종설 논문이고, 또 하나는 미국 소아청소년과 협회에서 펴낸 열과 해열제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두 편의 논문이 영국과 미국의 열과 해열제 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의 주요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편 모두 뇌 손상이나 열성 경련을 피하려면 해열제로 열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또한 열을 내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증상들을 완화시키는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첫번째 논문을 보면,

종종 열중증 (열병?) 에서 보이는 41.5도를 넘는 고열은 뇌 손상을 비롯한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열중증은 제대로 조절되지 않은 체온상승의 결과인 반면, 열은 조절된 체온 상승이다. 따라서 열을 동반한 질병을 앓는 아이에게서 위험할 정도의 고열은 매우 드물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유리 천정” 효과는 이미 1949년에 DuBois에 의해 기록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열이 그 자체로 위험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은 놀랍지 않다.

Temperatures above 41.5°C are sometimes seen in cases of hyperthermia, and temperatures this high can cause significant morbidity including brain damage. However, hyperthermia is the result of an uncontrolled rise in body temperature. Fever, in contrast, is a regulated rise in body temperature. … As such, dangerously high temperatures are rarely, if ever, encountered in children with feverish illnesses. This ‘glass ceiling’ effect with fever was noted by DuBois as long ago as 1949. From the above, it is not surprising that we did not find any evidence from our searches to suggest that fever is dangerous in itself.

열성 경련에 관해서는,

… 두 종설논문 모두 해열제가 경련을 방지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최근 수행된 양질의 무작위 대조실험도 예방적 해열제 사용의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이 연구는 대부분의 열성 경련이 열이 오르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는 결과를 얻었는데 이는 해열제가 열성 경련을 방지하는데 소용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 both reviews concluded that there was no evidence that antipyretics prevent seizures. More recently, a good quality randomised controlled trial showed no difference in the incidence of further seizures with prophylactic antipyretic agents. This study also showed that most febrile convulsions occur at the onset of fever, and this probably explains why prophylaxis does not work.

미국과 영국의 해열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종합해보면, (감기등에 동반된) 열을 가만히 둔다고 크게 문제가 생길 확률은 크지 않은 것 같고, 심지어 흔히 겁내는 뇌손상이나 열성 경련도 해열제 사용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인다.

왜 열이 나는가?

1996년에 출판된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를 읽었다면, 이런 결론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을 의학과 결합하려는 “다윈의학” (혹은 “진화의학”) 을 주창한다. 저자들은 감염과 싸우는 여러가지 적응을 소개하면서, 열이 동물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적응된 방어기제이며 열을 억제할 경우 오히려 회복을 방해하거나 개체를 죽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제시된 증거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Dipsosaurus dorsalis 라는 도마뱀 (총 12마리) 에 병균과 도마뱀 해열제를 주사했을 때, 0.6 도 이상 체온이 올라간 다섯 마리는 모두 살아남고 체온이 올라가지 않은 7마리는 모두 죽었다. (HA Bernheim, MJ Kluger, Science, 1976)
  2. 1927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Julius Wagner-Jauregg에게 주어졌는데, 그가 한 연구는 매독환자에게 말라리아를 일부러 감염시킬 경우 매독이 높은 확률로 치료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설은 말라리아가 일으키는 고열이 치료효과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Julius Wagner-Jauregg (1857-1940): Introducing fever therapy in the treatment of neurosyphilis2)
  3. 수두를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세트아미노펜 (타이레놀) 과 플라시보를 준 실험에서 타이레놀을 먹은 아이들은 회복하는데 평균 하루가 더 걸렸다. (MD Timothy et al., The Journal of Pediatrics, 1989)
  4. 감기 이중맹검 실험에서 아스피린과 아세트아미노펜을 처방받은 그룹은 플라시보 그룹에 비해 항체 반응이 덜 활발했고 코막힘이 심했다. (NMH Graham et al., The 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 1990)

“열을 내면 병이 낫는다” 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여러 문화에 걸쳐 나타났는데, 심지어 암치료에도 적용이 된 적이 있으며, 요새 발전하고 있는 면역요법의 시초이기도 하다.

열은 무조건 좋다?

여기까지 읽고 “아 열은 무조건 좋으니 해열제는 절대 쓰면 안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 “자연적인 것이 최고!”를 외치게 되면 허현회고미숙처럼 헛소리를 하게 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생명체와 생태계는 대단히 복잡하며 단순한 법칙 하나로 설명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떤 기능이 확실한 적응이라고 해도 그 기능이 항상 정확하게 작동하리라는 법도 없고, 부작용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강한 면역력”도 상황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독감이나 H1N1 독감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약한 면역력이 아니라 면역계가 지나치게 반응하는 현상인 사이토카인 폭풍이다.

위에 소개한 미국과 영국의 열과 해열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에서 “미열이 난다고 해열제를 꼭 먹일 필요가 없다”거나 “해열제는 큰 위험이 없다”고 명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쌓인 수많은 연구결과가 있었기 때문이지, 단순히 “열은 병원체와 싸우기 위해 적응된 기능이기때문에 막지 말아야 한다” 같은 단순한 주장 때문이 아니다. 의학에 대한 진화적, 역사적 관점이 다양한 병과 몸의 기작에 대한 이해를 늘려주는 건 사실이지만, 과학적 연구를 통한 증거의 뒷받침이 없다면 이런 관점도 그럴듯한 가설일 뿐이다.

  1. 구글 스콜라 기준 소아청소년과 저널 7위

  2. 열을 내어 병을 치료한다는 주장은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